제목 : 사도

개봉 : 2015년 9월

감독 : 이준익

출연 : 송강호, 유아인

 

 

아들을 죽인 왕, 영조

영조는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로 왕위에 오를 때부터 어미의 미천한 출신과 형인 경종 독살 의혹으로 인한 정통성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이 때문인지 영조는 심각한 완벽주의자였다. 유난히 자식복이 없던 영조는 그의 나이 42세의 늦은 나이에 아들을 갖게 되는데 이가 바로 사도세자, 이선이다. 

 

완벽주의자인 영조는 아들은 매우 엄하게 키웠다. 이선은 총명했으나 학문보다는 무예에 관심이 더 많았고 영조는 그런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 앞에서 세자를 망신 주거나 흉을 보는 것은 물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 세자가 부덕하여 일어난 일이라 하며 구박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했지만 영조의 과도한 간섭과 정치적 압박으로 화병에 걸리게 된다. 또한 영조는 툭하면 마음에도 없는 양위(왕위를 물려주는 것)를 하겠다며 소동을 피웠는데, 이는 신하들과 사도세자의 충심을 떠보기 위함이기도 하였고 당파싸움을 멈추게 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사도세자는 영조의 양위 선언이 있을 때면 석고대죄를 하며 양위를 거두어주길 거듭 청해야 했다. 이 같은 영조의 정신적 학대는 사도세자를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들이고 싶었던 사도세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아우르는 탕평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애초에 노론의 강력한 지지로 왕위에 오른 영조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영조는 정통성에 논란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니 영조의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노론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대리청정을 하며 노론의 득세를 느낀 사도세자는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소론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제 반대편에 선 사도세자가 달가울 리 없는 영조였다. 그리고 노론의 입장에서도 이미 자신들을 견제하는 세자가 왕이 된다면 그들의 입지가 줄어들 것은 당연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노론이 역으로 사도세자를 제거해 권력을 유지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사도세자는 점점 미쳐갔고 폭행, 살인 등 중죄를 저질렀고 이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지만 세자는 이를 거부한다. 결국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굶겨죽인다. 영조의 이러한 선택에도 정치적 이유가 있는데 영조는 아들을 그토록 못마땅해하고 구박한 것에 반해 손자인 세손은 매우 아꼈다. 이미 영조는 제 뒤를 이을 이로 아들이 아닌 손자를 점찍었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왕인 본인보다 아들인 세자가 먼저 죽어야 했다. 그러나 세손의 정통성을 해쳐서는 안 되었기에 세자는 결코 폐세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고 세자로서 죽어야만 했다.

 

 

리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어쩔 수 없는 영화라는 특성 때문인지 영조와 사도세자 모두 미화된 부분이 적지 않다. 각 인물이 가진 고뇌와 고통, 그리고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표현해낸 송강호와 유아인 두 배우의 연기력에는 박수를 보낸다. 

 

이 모든 비극은 영조로부터 발생되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왕릉 가는 길에 비가 오자 영조는 세자를 탓하며 화를 낸다. 또한 영조는 안 좋은 말을 들은 뒤 물로 귀를 씻은 뒤 버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세자가 문안인사를 오면 더러운 말을 들은 듯 귀를 씻어 버린다. 아무리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해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또 이해하기 힘든 점은 사도세자를 죽인 방법이다.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사도세자는 폐쇄공포증이 있어 좁고 어두운 곳을 무서워했다. 그런 그를 굳이 뒤주에 가두고 영조 스스로 못을 박아야 했을까. 그리고 물 한 모금 주지 못하게 하여 그곳에서 굶어 죽게 했어야 했을까. 

 

물론, 사도세자도 미화가 되었다. 정신병을 앓게 된 사도세자는 100여 명에 가까운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불행한 과거를 가진 사이코패스 살인마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실제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손자인 정조를 매우 아꼈고 사랑을 부족함 없이 줬다. 덕분에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것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라는 성군이 나오게 되었지만 반대로 그 사랑을 아들인 세자에게도 주었다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아들에게는 그러지 못했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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